변명 아닌 변명

from 피디질 2010.03.14 17:55



녹음 한 달 째.
방송이 나간 후 이래저래 말이 많은 상황인데, 뉴타입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 성우들만 취재하면 좋겠는데 기자님께서 피디 인터뷰도 한다고 하시니 난감하기 그지없다. 어차피 손바닥 반도 안되는 지면을 차지할 인터뷰일테고 내 하고 싶은 말 다 싣지도 못할 테니, 사전에 정리할 겸 적어봐야겠다. 나의 변명 아닌 변명들을.


1. 제목에 "BROTHERHOOD"가 붙는 이유
리메이크면 리메이크지, 뭔 뜬금없이 브라더후드냐는 질문들이 많다. 사실 이것은 일본 제작사의 요구에 따른 것으로, 이번 리메이크 시리즈는 해외수출시 모두 "강철의 연금술사 BROTHERHOOD"로 명기한다고 한다. 미국, 중국에서도 자막으로 방송되었다고 하는데, 모두 동일하게 브라더후드를 붙였다.
덧붙여 말하자면, 제작사측은 작품에 대한 홍보 문구에 "리메이크"라는 단어 자체를 언급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구 강철 시리즈와 자신들의 것을 아예 별개의 작품으로 생각한다는 것. ("리메이크", "원작" 이런 단어에 대해선 알레르기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더라;)
결국 이미 리메이크로 국내 팬들에게도 많이 알려져있음에도 불구하고 타이틀은 저렇게 나간다.


2. 전속성우 캐스팅에 대하여
전작 더빙에 대한 명성이 자자한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비교 당할 대상이 있기에 더더욱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이미 각종 성우 관련 커뮤니티에서 새로 바뀐 성우진에 실망하는 분들을 많이 봤다. 예전엔 중복의 연금술사였더니, 이제는 전속의 연금술사냐며... (그럼 전속의 연금술사는 나인가? -_-;)
사실, 초반부터 등장하는 몇몇 주요 캐릭터들에 전속을 배치한 것은 모험이라면 모험이다. 피디라고 기존 성우분들의 노련한 연기가 탐이 안 났겠나? 뭣하러 피디가 욕을 먹어가며 굳이 연기내공 부족한 전속성우로 대체해서 힘들게 작품을 끌어가겠나?
강철의 연금술사는 전체 63편에 총 120여명의 캐릭터가 등장하며, 이 중 70% 정도는 비중있게 출연한다고 본다. (게다가 온갖 조연급 캐릭터들도 하나 같이 '사연 있는' 사람들이다.) 주인공 형제가 점점 음모의 실체에 가까워질수록 만나는 사람도 많아지고, 함께 팀이 되어 싸운다. 싱국 사람들, 브릭스 군인들, 스카 일행, 형제의 지인들, 킴블리의 부하들까지... 그래서 작품의 중후반부부터는 등장인물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나서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한다. (난 설마 시그가 슬로스와 싸울줄 몰랐고, 버커니어와 후가 만날 줄은 몰랐다-_-; 오죽하면 내가 '캐릭터 맵'까지 그려가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겠나...) 작품 내용 전개상 초반보단 중반부부터 등장하는 캐릭터들에 프리성우를 캐스팅하는 게 밸런스가 맞고, 자문자답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윈리, 호크아이, 휴즈, 엔비 등 "어느 정도" 우리 전속 성우가 감당할만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 초반의 주연급 캐릭터들을 그들에게 맡겼다. 그렇게 함으로써 난 중반부부터 등장하는 주요인물에 더 많은 프리성우를 캐스팅할 수 있는 기회비용을 얻었다. 물론 자기네들과 10년, 20년씩 차이나는 선배들의 연기에 비교당하는 부담으로 어쩔줄 몰라해서 내가 다 미안해지더라. 그치만 그 잠재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맡길 수 있었고, 자기들 나름의 윈리, 호크아이, 휴즈를 잘 만들어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 가장 논란이 큰 휴즈와 엔비의 경우... 휴즈는 서진씨가 조금 가볍게 잡은 감이 있긴 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휴즈는 서글서글한 성격이고 남의 일이라도 발벗고 도와주는 따뜻한 성격의 사람이라, 무게 잡는 진지한 머스탱과 대비되는 게 좋다고도 생각했고... 근데 캐릭터가 좀 잡히려고 할 즘 죽어버려서-_-; 조금 더 휴즈의 등장이 길었다면, 더더욱 완성된 휴즈가 되지 않았을까?
엔비에 관해선 나도 할 말이 많다. "질투"의 엔비인만큼, 난 기본적으로 남자보단 여자 성우가 연기하는 쪽이 훨씬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왜 서유리씨인가? 앞서 언급한대로 전속성우 서유리씨의 잠재력을 믿었다. 일각에서는 너무 그 사람을 대놓고 밀어주는게 보인다고 하는데, 기본적으로 우리 회사는 윗선에서 개인 피디들의 캐스팅에 관해서 왈가불가하는 일이 절대 없다. 온전히 나 자신의 판단이었고, 그녀는 충분히 능력이 뒷받침되는 성우이다. 유리씨가 전속성우가 되기 이전부터 유명세에 안티팬이 있다보니, 관심이 집중되는 것 같은데... 만약에 유리씨한테 윈리를 맡겼어도 "여주인공을 맡기다니 대원에서 대놓고 서유리 밀어준다"는 말이 분명 나왔을 거다. 물론(!) 지금 그녀의 엔비는 불완전하다. 난 조금 더 띠껍고, 재수없는 엔비가 되었으면 좋겠지만, 유리씨의 엔비는 아직 미적지근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엔비는 이제야 조금씩 출연이 커지고 있고, 그녀의 엔비는 성장 중이다. 프리성우들도 처음부터 맡은 캐릭터의 연기를 100% 자리잡아 보여주지 못하지 않나? 조금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지켜봐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3. 중복출연에 대하여
위에서도 말했지만 강철은 정말 등장인물이 많다. 작가가 원망스러울 정도로-_-; 5회 이상 출연하는 캐릭터들을 제외하고도 일회성 에피소드에 나오는 인물들도 상당수. 전작에서 중복이 많았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등장인물수는 리메이크판이 두 배는 되는데 솔직히 중복 출연이 안 나올 수가 없다. (변명이라고 비난해도 할 수 없다. -_-;)
벌써부터 원석씨가 글러트니/펄만/터커, 유리씨가 피나코/로제/엔비 3관왕을 찍었다는 불만의 반응들이 나오고 있는데... 사실 터커와 로제의 경우, 구 시리즈에서 미친듯이 울궈먹은 캐릭터인데 리메이크판에서는 원작대로 따라가다보니 일회성 캐릭터에 가깝다. (물론 후반부에 리올에 돌아가서 마을을 재건 중인 로제를 다시 만나긴 하지만, 어쨌든 로제의 비중은 썩 큰 편이 아니다.)
터커와 로제뿐만 아니라, 패니냐/도미니크/그리드의 부하들 등등... 이런 일회성 캐릭터들은 아무래도 전속성우 12명에게 맡겨야 하는데, 한 성우가 같은 나이대의 비슷한 성격의 캐릭터를 맡지 않도록 최대한 배분중이다. 예를 들어 재현씨가 엘리시아라는 여아를 맡았으니 니나를 맡기지 않고 엄마인 트리샤를 맡기는 식으로. 최소한 자문자답만큼은 피하도록 노력중이랄까... 절대 생각없이 마구잡이로 뿌리고 있지 않다.


4. 주인공 및 그 외 성우진에 대하여
하도 전속성우와 중복출연에 대한 얘기만 언급되다 보니, 정작 주인공들의 연기와 작품 자체의 재미에 대한 감상이 없는 게 개인적으로 좀 아쉽고 서운하다. 에드 역을 맡으신 손정아 선배님의 연기가 얼마나 더 무르익고 건재한지, 알 역을 맡으신 윤미나 선배님의 연기가 얼마나 일본 성우보다 더 섬세한 감정표현을 하는지에 대한 반응이 없다는 말이다.
손정아 선배님의 경우엔 이번 작품에서 처음으로 함께 일하는데, 우리 엄마보다 몇 살은 더 많으신 분께서 어쩜 그렇게 열정적으로 연기하실 수 있는지, 정말 존경스럽기 그지없다. 사실 그런 정상의 위치에 있는 성우라면 자기 연기에 대한 고집 같은 게 생기기 마련이고, 그에 대한 비판을 쉽게 못 받아들일 수 있는데, 손정아 선배님은 절대 그렇지 않다. "조금이라도 아줌마 소리 같이 들린다든가, 가늘어진 목소리가 나면 바로 NG 내고 끊어달라"고 당신의 딸뻘 되는 피디한테 먼저 말씀하시는게 쉽지 않을텐데. 그런 열정적이고도 겸손한 마음가짐이 그 연세에도 정상을 지킬 수 있는 그 분의 비결이 아닐까 싶다. 목 건강상 하루 3편 녹음이 무리라서 미리 한 편을 따로 날잡아 녹음하고 있지만, 손정아 선배님의 에드 연기를 위한 것이기에 전혀 고되지 않다.
윤미나 선배님은 생각해보면 은근히 같이 한 작품이 많다. 입봉작도 그렇고, 미나미가의 카나도 그렇고. 이번에 또 느끼는 거지만 이 분은 참 피디적인 시각을 가진 성우다. 보통 성우들은 대부분 자기가 맡은 역할에 몰입하느라 작품 전체를 못 보는 경우도 허다한데, 윤미나 선배는 작품의 세계관까지 전체를 꿰뚫고 그에 어울리는 자기 역할을 연기해내는 타입 같다. 사실 강철 첫 녹음 후 따로 만나 작품에 대한, 그리고 전속성우들의 연기에 대한 이런저런 코멘트를 해주셨는데... 나도 피디로서 깨닫고 각성한 바가 많았고, 전속들도 그러한 어드바이스에 큰 깨우침을 받았다. 정말 이런 연기자를 만난다는 건 연출자로서 크나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주요 인물 중 캐스팅이 변경된 스카에 대한 반응은 가지각색이더라. 원작자가 "터미네이터"를 모델 삼았다는 얘길 듣고 난 옳다구나 무릎을 쳤다. 흐흐. 내 생각에도 스카는 좀 무게가 잡힌 목소리가 좋을 것 같았고, 나이대를 초월해서 강력한 포스가 있는 이미지를 원했다. 그래서 좀더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캐스팅을 변경한 것. 킴블리도 기존 성우분이 잘 해주시긴 했지만, 구 시리즈에서보다 더욱 비중이 크고 비열한 악역인만큼 변경이 필요했다. 최한 선배님 특유의 세련된 연기가 킴블리의 하얀 양복+백구두에 어울릴 것도 같았고... 흐흐.
구작이 만화 원작과 다르게 내용 전개를 하면서 정말 원작과는 거리가 멀게 표현된 캐릭터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게 호엔하임. 구작에선 좀 뭐랄까, 바람둥이 같기도 하고-_-; 진짜 호엔하임은 사실은 굉장히 자기 자식들을 아끼지만 죄책감에 그들 앞에서 차마 아버지 행세도 못하는 사람인데.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호엔하임 캐스팅도 계속해서 고민 중이다.


5. 연출에 대하여
연출이라... 입봉 만 2년차에 연출 주안점에 대해 인터뷰를 해야한다니; 사실 피디 인터뷰 자체가 부담스럽다.
일단 성우진을 떠나서 연출 자체도 비교적 내공이 부족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구 시리즈를 하신 피디님은 (아무리 성우팬들에게 욕을 먹는다고 해도) 국내 더빙 업계에서 알아주는 능력자이시고, 내가 입사할 때 면접관이셨던 분이기도 하다 -_-; 훌륭한 대작인데다, 전작이 좋은 더빙으로 호평을 받았었기에 나에게 오는 부담도 컸다. 하지만, 기존 성우진을 그대~~~로 쓰지 않는 것은, 피디로서 나의 욕심이 약간은 더해진 것도 있다. 이것만큼은 "내 작품"이니까 내 마음대로 바꾸고 싶은 것도 있었고.
한정된 예산 내에서 최대한의 퀄리티를 뽑아내는 것이 훌륭한 피디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강철은 솔직히 예산이 낮게 측정된 게 아니다. (뭐, 불경기라 전반적으로 제작비가 다운된 건 사실이지만...) 자신있게 말하는데 이건 등장인물이 너무너무너무(!!!) 많아서 캐스팅에 애로 사항이 많은 케이스다. 어쨌든 그래서 내가 최상의 퀄리티를 만들어내고 있냐고 묻는다면 내 입으로는 무슨 말을 못 하겠고;;; 일단 지금까지의 반응으로 봐선 10점 만점에 빵점일까 싶지만, 이전 시리즈와는 별개의 작품으로 생각해준다면 (일본제작사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도 좀 봐줄만 하지 않을까...
그 외 짜잘한 얘기들을 하자면... 네이밍 때문에 고민되는 부분이 꽤 많다. 만화책에서 "킹 브래드레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실은 영문 표기상 Bradley이므로 "브래들리"가 맞는 표기법이다. 글래먼도 "그루먼(Grumman)"이라고... 해서 모두 영문 표기에 맞춰 가기로 했는데, 문제는 린 야오. 영문 표기가 "Ling Yao"라서 "링"으로 가야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는데... 너무 기지배 같잖아! (버럭) 게다가 나중에 그리드랑 합치면 "그리링"이 될 수도 없고... 린은 그냥 "린"으로 가자 (예외라는 게 있을 수도 있지-ㅅ-) 아, 작가님이 재밌는 사실을 발견. 브래들리는 장갑차, 브레다는 총, 그루먼은 항공기에서 따온 이름들이라고;
그리고 15/19세 편성에 대한 논란. 솔직히 이 작품이 19세로 하기엔 전반적으로 좀 약하다. 단, 중간중간 호문쿨루스들이 잘리고 썰리고 터지는 게 좀 걸린다는 거?;;; 그래서 편성팀에서 작정하고 15세는 가차없이 편집하고 19세는 편집없이 (모자이크를 하더라도) 그대로 하기로 한 것이다. 사실 최근 방통위의 심의가 매우 엄격해져서 짱구의 헐벗은 엉덩이도 가리는 판국이라, 잔인한 장면이라면 밤11시에 방영하는 19세 판이라도 여과없이 보여줄 순 없는 상황이다. 호문쿨루스가 죽여도 살아나는 장면들은 내용상 스킵이 어려운데, 나도 이건 심히 걱정이다;;;


그냥 작품에 대한 생각 정리 겸 쓰려던 게 장문의 글이 되어버렸네;
어차피 인터뷰 때 이 얘길 다 하지도 못할테고 반에 반도 실리지 못하겠지만-_- 그래도 뭔가 머릿속이 정리되는 느낌? 으으 근데 이걸 누가 본다고 이리도 열을 내며 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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